유느갱 2020. 7. 26. 02:40

이야기는 어떤 힘을 가진다.
말은 어떤 에너지를 가진다.
내가 부정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말과 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늘 어렵다.
오늘은 좀 피곤하다.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글을 써도 내 감정이 글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버릴 것 같아서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그냥 내일로 하루 더 미뤄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내가 만든 ‘성실한 나’라는 모습을 버리는 건 또 용기가 안난다. 해야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 이 와중에 완벽함까지 버리지 못했다면 나는 죄책감에 서러움까지 안고 잠에 들었어야 할거다. 오늘도 나는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다. 적어도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두 달 전엔가, 사두었던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이제야 들었다. 김초엽 작가의 인지 공간은 뭔가 이과의 느낌이 들어서 책을 사자마자 읽었는데, 생각과는 조금 달랐지만 SF장르였다. 하지만 장르만 과학이었고, 안에 담고 있는 것은 좀 더 철학적인 내용이었다.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친구는 타의적으로 사회에서 도태되었다. 스스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독일에 잠깐 있었을 때,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장애인은 교통비가 없고(일부 제외), 본인 뿐 아니라 같이 다니는 사람까지 교통비가 면제된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 의무 채용의 비율이 높아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 플랫메이트 중 한 명도 장애가 있는 친구였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은 취업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곤 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아직도 곱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한 순간에 사고를 당할 수 있고, 바로 앞의 일을 모르는데, 조금 더 너그러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또 글이 길어져 버렸는데, 오늘 읽은 단편은 강화길 작가의 음복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무도 공론화하지 않는, 가족에서의 악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딸 아이의 역할을, 아들의 역할을 결정지어 버린다. 특히 제사라는 특수한 이벤트는 거의 완전체에 가깝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여자고, 차려진 제사상에서 조상을 만날 수 있는 건 남자다. 완벽하게 나뉘어진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그대로 노출되고, 그렇게 모든 것들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나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우리 OO이는 참 착한데, 아들이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귀에 닳도록 들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악습을 되물림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또 우리 가족의 제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곧 생각을 멈춘다. 마주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