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가 체질
나는 내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친구들과 싸우며 자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믿었고,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더 크고 몸이 자라면서 나 스스로 굉장히 감성적이고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물론 아직도 어떠한 상황에서 내가 기분 나쁜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상처를 받고 화를 내고 울고 있지만 다른 사람도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까 고민하고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많이 했다. 사실 정답은 없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도 사람의 감정이니 말이다. 정말 싫은 건, 감정을 쏟느라고 내가 할 일을 못하는 나 자신인 것 같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물론 이건 누구나 충격받을 일이긴 했지만, 감정은 생각할수록 더 커지고 결국 나를 잡아 삼킨다. 그저 가만히 누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은 상태… 내가 누에였다면 내 스스로 실을 토해내고 또 토해내서 나를 감춰버릴 텐데.그냥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눈 감으면 하루가 다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다 사라져 버렸으면.
나 스스로를 감정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이 필요해서 하루 종일 누워서 드라마만 봤다. 남들 다 볼볼 때 안 보고 이제야 보기 시작한 ‘멜로가 체질’. 어른의 세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여자들의 이야기랄까. 물론, 평범하지 만은 않은 사람들인 것 같긴 하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결국 중심은 멜로.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건 아무래도 다큐 감독 이은정 씨(?)이다.개인적으로 정신과를 가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한계를 느끼고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내가 우울한 사람들을 치료할 명분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태어나서부터 기분이 우울한 사람들도 있고, 어떠한 사건을 기점으로 우울한 사람이 있을 텐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을 내가 뭐라고 억지로 살려둘 수 있을까. 내가 신도 아닌데. 자살시도를 여러 번하고 정신과 격리병동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생각은 생각보다 확고하고 깊어서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다. 옛날부터 있었던 고민인데, 정신과 공부를 하고 실습을 해도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은 정신과 의사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갑자기 삼천포로 글이 빠졌는데, 이은정 감독은 죽은 전남편을 계속 보고, 심지어 이야기를 나눈다. 정신과에서는 스스로 질병 상태임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것을 병식(insight)라고 한다. Insight도 6단계로 나누어 판단하는데, 1) 질병에 대한 완전한 부정 complete denial of illness, 2) 아프다는 것에 약간은 인식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부정하는 상황 slight awareness of being sick and needing help, but denying at the same time, 3) 질병이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만 그것을 외부나 신체적인 이유라고 생각함 awareness of being sick, but it is attributed to external or physical factors, 4) 자기 내부에 잘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식 awareness of being sick, due to something unknown in self, 5) 지식적인 병식 intellectual insight 그리고 마지막으로 6) 진정한 감정적 병식 True emotional insight이다. 그만큼 병식을 어느 정도 하느냐가 치료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정신과에 스스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4-5단계인데,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가보라고 하네요'라고 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병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치료에 첫 단계이고, 그래야 치료가 진행될 수 있는데, 어떻게든 치료로 이끄는 교수님들이 정말 대단할 뿐이다. 이은정 감독은 자신의 영상을 보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병식을 얻게 되는데, 그 과정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병을 마주하는 것이 이처럼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아직 좋지는 않은 곳에서 말이다. 미국에서는 마치 감기약을 먹듯, (실제로 미국에서 감기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신과를 갈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정신과 진료의 현실이 아직은 녹록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오늘은 나도 마음이 참 아픈 날이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픈 건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내일은.. 침대에서 벗어나서 할 일을 해내는 나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