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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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느갱 2020. 5. 5. 00:28

  이비인후과 실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다. 오늘은 휴가인 교수님들이 많았는지 수술도 잡혀있지 않았고, 외래는 거부당했고, 티칭 일정이 있었으나 간단한 티칭이었다. ENT에 관심이 없었어서 다행이지, 만약 있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 같다. 지금 아니면 어쩌면 평생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매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습에 임하고 있다. 실습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다른 것들을 놓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80일째. 이 정도로 세뇌했으면 앞으로도 큰일은 없을 것 같다. 남은 실습 일정도 힘내 볼까나.

  오늘 티칭은 전공의 3년 차?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는데, 모든 우리 조원들에게 무슨 과를 가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내과라고 말했는데 선생님이 나보고 바로 '선생님은 내과 갈 상이네~'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기분이 조금 묘했다. 내과를 가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어떤지 사실 잘 모르겠다. 공부를 많이 하는 과라고는 알려져 있는데, 그럼 내가 공부하는 사람처럼 생겼다는 건가, 그럼 그렇게 좋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외모를 평가한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말하는 걸 텐데도 갑자기 아주 조오 금 마음에 걸렸다. 근데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긴 해서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나한테 스텝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그것까지도 내 얼굴에 쓰여있는 건가? 내가 재미있는 얼굴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괜히 닥터 프렌즈의 우창윤 선생님 얼굴을 계속 보고, 분위기도 보고 그러고 있다. 그래도 답이 안 나와. 전공의 선생님 말대로 경치 좋은 곳에 있는 럭셔리 호텔에 묵으면서 생각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번에 쳤던 실기시험 성적표가 배부되었다. 다행히 모든 항목에서 PASS를 했다. 저번에 비해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더니 저번보다 점수가 잘 나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잘 나온 편이라 혹시 실기시험을 첫조로 가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국가고시 실기시험이 9-10월로 예정되어 있는데, 9월에 실기를 치고 나면 긴장이 확 풀려서 1월에 있을 필기시험을 열심히 공부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시험을 못 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또 그럴 위인은 못되어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만 있다.

  성적표에 모의환자가 직접 써준 피드백이 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자궁내 성장지연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확한 의학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왜인지 환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그걸 풀어서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같은 게 생긴다. 어떻게 해야 맞을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생각났는데, 어려운 단어이고 생소한 단어일 지라도 환자에게 병명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그 후에 설명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고 이제야 깨달았다. 의사는 환자에게 질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전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정확한 용어의 사용인 것 같다. 그래야 환자가 집에 가서 검색을 해볼 수도 있고, 병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은 치료의 시작 중 하나일 테니까. 이번 시험을 통해서 이렇게 또 하나 배운 것 같다.

  일기에 쓰고 싶은 다른 생각들이 많았는데, 쓰다 보니 또 이렇게 한 바가지가 되었다. 일상에 대해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알게 되는 시간인 것 같아 조금은 슬프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나의 말을 들어주는 이런 매체가 있어서. 오늘도 이렇게 지나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