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를 처음 본 곳은 알쓸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여러 지식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책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다. 말투나 표현을 넘어서 비언어적 요소들 조차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의 책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소설 속의 김영하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관련해서는 이전에도 글을 썼는데, 주인공이 겪는 상황들이나 가출 후의 삶에 대해서 너무 어둡게 그렸다고 할까. 내면이 깊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굉장히 놀랐다. 세상의 풍파를 별로 겪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물론, 작품 속의 인물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일 뿐, 작가의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머릿 속에서 창작되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번에 읽은 책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1996년 작품으로, 제1회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이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이 소설 자체가 주인공이 쓴 하나의 소설이라는 형태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가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이야기의 화자가 누구인지 헷갈려 전 페이지로 돌아가기를 몇 번 한 것 같다. 타인의 이야기이지만, 주인공은 그들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으로 그들의 삶에 가장 깊게 개입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주인공은 그림을 자주 언급하면서 타인을 그림 속의 인물로 표현한다. 그 중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가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다. 그는 유디트를 이렇게 표현한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피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여버렸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 우디트. 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이 말을 듣고 그림을 찾아보니 정말 그랬다. 그리고 책을 계속 읽다보니 소설 속의 ‘유디트’에게 나도 모르게 어떤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껍데기로만 살아가는 삶. 유디트가 자신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건 오로지 자신의 뜻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서야 존엄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 등 법안이 마련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 김영하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시점에 죽음에 대해서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설을 읽고 김영하의 팟캐스트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찾아들었다. 타 작가의 글을 소개할 때와는 다른,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이어폰을 타고 들렸다. 팟캐스트에서는 자신의 글을 소개하기 보다는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중국의 산동대에서 책을 낭독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자신의 의도했던 파트가 아니라 다른 파트를 산동대 학생이 열심히 읽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김영하는 자신의 책에 여러 ‘지뢰밭’이 있다고 표현한다. 지뢰밭이라니! 나는 작가들이 성적인 묘사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지뢰밭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너무 웃겼다. 그들도 알고는 있구나, 다만 글을 쓰는 거구나. 특히 산동대는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다른 어떤 지역보다 보수적인 대학이라고 한다. 참 별일이 다있다.
책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작가의 흡입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글을 잘쓰는 사람이 말도 잘하는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김영하는 자신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단어를 바꾸기도, 문장을 바꾸기도 한다고 한다. 초판을 읽으면 또 그만의 날것의 매력이 있을 것 같다. 재밌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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