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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러닝메이트

달리기는 늘 즐겁다.
힘들지만, 바람을 맞고 달리다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기도, 하던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한다. 매일 보던 풍경들도 달리면서 보면 뭔가 달라보인다.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는다. 땀 흘리는 자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일주일에 3번은 달리려고 노력하는데, 늘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약속 때문에, 어떤 날은 속이 너무 안 좋아서, 그리고 날씨를 핑계로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막상 뛰면 즐거운데, 달리는 것보다 달리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더 힘들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뛰는 것이 아닌데다가, 혼자 하다보니 안하는 날에도 그냥 합리화를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몇 주 전이었나, 날이 너무 더워서 밤 11시에 뛰는 날이었다. 평소의 코스처럼 왕복 4km.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뜻밖의 러닝 메이트를 만났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었다. 뭐라고 일컫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군복 안에 입는 카모플라쥬 패턴의 반팔을 입고 뛰는 아저씨였다. 요즘의 디지털 무늬가 아니라 예전의 그.. 패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앞지르면 그 아저씨가 또 나를 앞지르고.. 이런 식이었다. 그 아저씨가 내 앞을 달리면 참을 수 없는 땀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반드시 앞으로 가야했다. 그렇게 달리다보니 평소보다 뭔가 덜 힘들었다. 신기했다.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구나. 얼굴 붉어진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 다음날이었나, 또 러닝을 나갔는데 또 그 아저씨를 마주쳤다. 마찬가지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창 달리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또 내 앞을 지나쳐갔다. 질 수 없지.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졌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다. 건너편의 한강은 여전히 밝았다. 밤이 다 되었지만 계속 불을 밝히고 있는 건물들, 그리고 아파트들. 저기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싶은 한강 아파트까지. (나의 꿈의 아파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분이 참 좋았다. 말 그대로의 회복 러닝. 내 몸이 받아들일만큼만, 내가 행복하기 위한 달리기. 이게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그 후로 날이 꾸리꾸리한 탓에 또 한동안 달리기를 나가지 못했다.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한 것도 있었다. 뭐라도 시작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나간 달리기. 또 조금 쉬었다고 달리기가 힘들었다. 몸은 역시 거짓말을 못한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그 아저씨를 또 마주쳤다. 그 아저씨도 나를 보고 웃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곧 멈출 것 같았던 다리가 조금씩 힘을 내주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같이 달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한테 말을 걸었다.

“혼자 달리는게 어찌나 심심하던지. 학생 목표로 달려요 내가”

아저씨는 집이 어딘지부터, 직업이 뭐고, 누구도 빼놓지 않는 자식 자랑까지 줄줄이 읊으셨다. 같이 달려서 좋다고. 이젠 좀 덜 심심하겠다고. 대화를 하면서 뛰니까 몸이 힘든걸 절로 잊었다. 달리면서 누군가와 말을 한 것도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되는구나 싶었다. 나는 Nike Run Club 앱을 사용해서 러닝을 하는데, 매번 기록할 때마다 강도응 입력하는 구간에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는데, 대화가 될 정도의 러닝을 하고 있는 거였다. 혼자 달리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저씨는 다음 러닝을 또 약속하고 돌아갔다. 사실 그게 바로 오늘인데,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원래는 나갈 생각이었는데, 친구와의 선약이 길어지는 탓에 가지 못했다. 실망했을 아저씨의 모습이 조금 그려지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온 세상이 나를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내일 나가면 또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꼭 사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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