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착 3정거장 전에 내렸다. 교차로라서 차는 엄청 많지만, 적당히 어둡고 사람은 별로 없는 고즈넉한 길이라 그 길이 참 좋다. 그리고 조금만 걸으면 옆에서 한강이 펼쳐지고 있다. 저 건너편에는 나의 꿈의 아파트, 그리고 남산. 전광판의 빛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눈이 부실 정도지만 강만큼은 참 조용하다. 한강도 가까이에서 보면 생각보다 많은 소리를 내고 있고, 무엇보다 그 냄새가 굉장한 존재감을 펼치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그렇게 좋은 풍경일 수가 없다. 서울 생활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한강이 차지할 거다.
그 길에는 어느새 많은 추억들이 생겨버렸다. 언니 말고는 그 길을 같이 걸은 사람은 없지만, 기분이 너무 좋을 때, 너무 우울할 때, 그냥 답답할 때 그곳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전 남자친구와 썸을 타고 있을 때에는, 너무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걸었고, 좋아하는 음악과 어디선가 나는 꽃내음에 정신을 못차렸다. 마침 달도 보름달이었는데, 달 보면서도 한참을 웃고, 마음은 둥둥 뛰어서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했었지. 요즘도 그 길을 걸으면서 그때의 나를 생각한다. 많은 일들이 휘몰아치고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그때의 내 감정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사람은 행복한 기억으로 살아간다고 하는데, 힘들 때마다 그 길을 걷는 건 그때의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다시 돌아와서, 그 날은 그냥 하루종일 앉아있었다는 찌뿌둥한 느낌에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고 그 사람에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카톡을 하면서 걸었다. 막상 그곳에서는 아는 척을 잘 못했는데, 아직은 내 전 연애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불편함이 조금은 남았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튼 길을 다 걷다가 우연히 동기도 마주쳤다. 평소에는 아는 사람을 절대 만날 일 없는 동선인데, 그날따라 많이 마주쳤다. 그 친구는 내가 저멀리서 걸어왔다고 하니까 ‘역시 자유로운 영혼이네~~ 잘 어울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 내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다시 되찾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원하는 걸 먹고, 원하는 곳에서 공부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당연한 것들인데 나는 왜 그 동안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까? 어떤 정형화된 길, 잘 놓여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조금씩은 내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응원해야겠다. 오늘도 꼭 걸어야지.
오늘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