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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성추행이 별 것도 아니라고?

잠깐 실수할 수도 있지, 성폭행도 아니고.

라는 댓글들이 쏟아졌다. 나도 이 사건이 어떤 판결이 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었기에 이렇다 말하는 게 무섭지만, 저 댓글에는 정말 화가 났다. 어떤 성별을 떠나서 성추행은 평생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 있는 사건이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성추행 당하신 적이 있나요, 라고 물어본 적은 없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지 모르지만, 적어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순간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22살 때였나, 많은 대학생들이 경험하는 교환학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유럽은 참 열려있는 곳이라서 그런가, 아님 내가 조심성이 없어서 그런가. 독일에 옥토버페스트라는 맥주축제 갔을 때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저 내가 맥주에 취해서 웃고 있어서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나. 너무 기분 나빴음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별로였다. 또, 생각나는 간단한 일화로는 시티 투어를 같이 하던 사람이 집에 뭘 두고 왔다면서 잠깐 갔다와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갑자기 나한테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내가 뭣도 모르고 생각없이 집에 갔기 때문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참 순진했구나 싶은데, 누가 잘못이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한다면 나는 좀 힘이 빠질 것 같다.

한 번은 플랫 메이트 중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였나,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다들 가족들와 시간을 보내기에 그 친구의 초대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친구의 외갓집 모임이었는데, 주최자는 외삼촌이었다. 다들 분위기도 너무 좋고, 맛있는 음식과 맥주! 진짜 좋았는데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으면 좋았을걸.. 저녁이 되어 다른 가족들이 집에 돌아가고 외삼촌과 친구 그리고 나만 그 집에 남게 되었다. 그 사람은 계속 나랑 춤을 추고 싶어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였는데... 점점 노골적으로 붙었고 나는 입만 웃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예의 그런게 다 뭐라고. 지금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지만, 그 때에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친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친구는 내 눈을 피했다. 알고 있었을 텐데, 사람들이 묵인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결국 가족은 가족이구나. 착잡했다. 밤이 되니까 노골적으로 같이 자자고 했다. 방문을 열어놓고 계속 추파를 보내고. 내가 눈을 피하면 싫어하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니까 나를 아예 피하기 시작했다. 아무일도 없었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걸까?

그 때는 외국이니까, 성적 표현에 더 자유로운 나라니까, 내가 좀 더 강해지면 돼 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부학 실습을 할 때 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술에 취한 조교님이 와서는 나보고 잠깐 나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로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나 성적 안 좋은 거 알고 있다고, 시험 문제를 알려주겠다 어쩐다 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 사무실에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고,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니까 다른 강의실을 들어가려고 하고... 아 생각해보니 옥상도 데리고 갔구나. 나도 점점 겁이 났다. 이 사람 왜 이러지? 마지막으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는.. 나보고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때, 나오자마자 나는 다른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섭다고.., 그때를 다시 생각하면 또 무섭다. 술에 취했으니까 무시하고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았어야 하는데. 내 해부학 성적 낮은게, 그게 참 무슨 큰일이라고 그렇게 나를 잃었을까.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 상황 자체가 나쁜건데, 내 성적을 매기는 사람이라는 거 때문에 나는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정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 자기 의견을 올곧게 피력하는 사람. 이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 사건에 대해서 A에게 꺼내보았자만, 돌아오는 말은 “진짜 문제를 알려주려고 한걸수도 있잖아” 였다. 그렇게 나는 모든걸 덮었다. 아무렇지 않은척 그 해부학 교실을 들어가고, 조교를 마주치고. 다들 성추행 당하고도 어떻게 계속 다니냐고 하는데, 그럼 나는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걸까? 주변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건 별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중학교 때 봤던 바바리맨은 아직도 기억 나고. 심지어 대학 다니면서 만났던 바바리맨도 나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한동안은 그 길을 다시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때 있었던 남자친구 조차도, 내 두려움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

어렸을 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성폭행을 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아마 30%였던 것 같다.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힘든게 현실이고, 피의자가 아는 사람일 때에는 그게 배가 된다. 피해자가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상실감이라고 한다. 그 상실감은 회복이 쉽지 않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같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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