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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의학

P선생과 같은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대할 때면 우리는 그러한 경우가 ‘독특하고 유례없는’ 경우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연히 1956년에 나온 <브레인>지를 읽다가 P선생과 이상할 정도로 똑같은 사례를 발견했을 때, 아주 큰 흥미로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중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김영하 작가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일전에 블로그에도 팟캐스트 관련해서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저작권 이슈로 인해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여러 고전들 그리고 작가 당신의 글까지도 팟캐스트로 접하고 배경지식도 배우고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남이 잘 정리하고 알기 쉽게 알려주는 지식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감사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김영하 작가가 읽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그 냉소적인 말투와 딱 어울리는 문체였다. 두 세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기다란 문장들이 아닌 간결하고도 깔끔한 글. 신경 정신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자신이 겪거나 보았던 환자들의 케이스를 엮어놓은 책이기에 어떻게 보면 임상 레포트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철학적인 고찰들이 담겨 있어 또 마냥 가볍지는 않다.

정신과는 의학의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사람 자체를 보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과에서 손목 관절이라던가, 발열, 어지럼 등 어떤 증상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정신과의 증상은 사람마다 표현하기에 달렸다. 심지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P선생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요즘 달라졌음을 느끼고 병원에 데리고 오는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다보면 꼭 듣는 질문 중에 기억나는 첫 꿈이 무엇이냐는 거다. 꿈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특히 어렸을 때의 무의식은 겪은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때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울해요, 라는 증상으로 오더라도 우리는 그의 삶 자체를 듣게 된다. 그래서 참 매력적이면서도 어려운 학문이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대할 때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불친절하고 속된 말로 싸가지가 없어야 하는 건 아닌데, 어쨌든 치료자로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환자의 감정에 완전히 휘말려서도 안되고, 그러면서도 환자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어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환자에게 너무 이입하면, 의사도 사람이기에 그 환자를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환자가 분노나 화풀이를 치료자에게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환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면 환자가 의사에게 더 큰 기대치를 갖게 되고, 자그마한 일에 돌아설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의문이 든다. 환자들은 친절한 의사를 바라는 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를 바라는 가. 오늘 우연히 보게 된 유투버는 20대에 루게릭를 판정받은 환자였는데, 의사가 말하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기침을 많이 하는 것은 루게릭 병의 증상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더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루게릭 병은 운동 신경 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되는 질환으로, 호흡을 하는 호흡근 또한 근육이기에, 혀근육도 수축되기에 기침 증상이 나타난다. 루게릭 병은 현재 치료제가 없고, 진행을 늦추기 위한 여러가지 약제들과 증상 완화 치료, 그리고 재활만 이루어지고 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의사의 입장도, 그 사실에 상처를 받은 환자도 다 이해가 갔다. 환자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도, 결국 환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말을 해야 환자에게 더 닿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치료하는 대상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 것이겠지. 입원 환자들을 보게 되면, 혈액 검사나 흉부 x선 촬영 등 매일 같이 검사 결과가 쏟아지고, 그걸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든다. 그러다보면, 환자를 놓치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에 나와있는 그 숫자들만이 아닌데 말이다.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하고 정신없을 것 같지만, 이 마음 하나만은 잘 간직하고 있어야 겠다. 내 앞에 앉아있는 환자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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